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이브러햄 링컨 (문단 편집) === 낙선, 실패, 패배로 점철된 인생 === [[파일:external/www.lucynagalik.com/Alexander-Gardner-Sanna-Dullaway-Abraham-Lincoln.jpg]] 1809년 2월 12일, 에이브러햄은 켄터키주에서 넉넉치 못한 목수 토머스 링컨(Thomas Lincoln, 1778 ~ 1851)의 아들로 태어났다(애칭은 에이브). 아버지 토머스가 확고한 기독교적 신념의 소유자라 매우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틀에서 자랐다고 한다. 남매로는 누나 세라 링컨 그릭스비(1807 ~ 1828)가 있는데, 살던 곳이 워낙 시골 개척지라서 주변 이웃이 없던 탓에 누나와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며 놀았기에 누나와 정이 많았는데, 세라는 결혼 이후 아기를 낳다가 21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 링컨을 슬프게 했다. 링컨 아버지가 그 주에서 3번째 고액 납세자라는 과세자료를 들어서 링컨은 아버지가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부유하게 자라지 못했다는 해석도 있고[* 하지만 [[http://ko.wikipedia.org/wiki/%EC%97%90%EC%9D%B4%EB%B8%8C%EB%9F%AC%ED%96%84_%EB%A7%81%EC%BB%A8|위키백과]]와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네이버 캐스트]]에서는 원만한 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매우 검소한 성격이라 부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가난하게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한 [[속사정#s-1|속사정]]을 알아보면,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원래는 [[켄터키]] 주에서 15번째 가는 [[부농#s-1|부농]]이었으나, 링컨이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의 [[파산]]을 경험한 후 [[인디애나]] 주로 거처를 옮겼다. 더군다나 [[재혼]] 후에 식구가 불어나자 생활고에 찌들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고, 링컨에게 공부가 아닌 [[농사]]와 노동의 길을 강요하며 생계의 짐을 지웠다는 일화 역시 잘 알려져 있고 링컨 스스로도 자주 언급한 바 있다. 가족 소유의 농장에서만 일한 게 아니라, 주변 이웃들의 농장에 품삯을 받고 일손으로 보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파산 이후로는 식구 모두가 원체 가난하게 살았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토머스 링컨은 후처 사라와 달리 교육보다는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인물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애를 너무 부려먹는다"고 지적할 정도로 링컨을 지나치게 혹사시켜 아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상당히 독선적인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들이 시간을 쪼개 독서와 공부에 매진하면 '일을 안 하려고 게으름 부린다'고 생각했다. 화전민에 가까운 개척농 집안이었다는 것과 아버지 본인이 까막눈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렇게 단정했을 수도 있다. 다만 아버지는 어느 사기꾼이 자신이 문맹인 걸 악용해 사기를 치려던 것을 사인하기 직전에 아들 에이브러햄 링컨이 간신히 막은 일이 있은 이후부터 공부를 하는 것을 인정했다. 원래는 땅의 일부만 팔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사기꾼이 땅을 몽땅 다 판다는 것으로 계약서를 바꿔놓았고, 이 장면을 본 링컨이 뭔가 이상해서 계약서를 읽어보고는 뭔가 수상하다는 태도로 '''"아버지, 이 내용대로 하면 우리 땅 몽땅 다 뺏기는데요?"''' 라고 하자 비로소 사기라는 것을 알아차린 아버지가 벌컥 화를 내면서 [[사기꾼]]을 쫓아냈다. 이 사건 이후부터 비로소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링컨도 이것에 대해 불만을 품어 이후 자신은 아들(특히 삼남 윌리와 사남 테드)에게 매우 자상하고 친밀한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http://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09/07/lincolns-emancipation/307487/|심지어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굴렸던 기억 때문에 노예해방 사상을 품게 되었다는 주장]](영어)도 있다. 즉, 당해봤기에 인간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노동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는 얘기. 때때로 나도는 링컨의 아버지가 구두장이였다는 일화는 [[오쇼 라즈니쉬]]의 책에서 처음 나타나나, 그 진위와 관련된 사항을 [[교차검증]]할 수 없어 진위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링컨의 친어머니 낸시 링컨(Nancy Lincoln Hanks, 1784 ~ 1818, 혼전 이름은 낸시 행크스)은 그가 9살 때 서양등골나물[* 미국 등 북아메리카 지역이 산지로, 한국에서는 1978년에 최초 발견되어 이와 같이 명명되었다.]이라는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먹고 걸리는 밀크병(Milk sickness)에 걸려 죽었다.[* 서양등골나물은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동부 해안에서는 없고, 중서부 지방에 자생하는 식물로, 소나 양 같은 가축은 목초지가 드물어지는 가뭄같은 상황이 아니면 평상시에는 이 풀을 안 먹지만 먹을 게 없으면 결국 뜯어먹게 된다. 그러면 이 식물의 독성성분이 트레메톨(tremetol)이 그 가축의 고기나 젖에 섞여나와 그걸 먹은 사람에게 복통, 구토 등의 증세를 일으키고 2일 ~ 10일 사이에 사망하게 된다. 이 식물이 원인이라는 건 원주민 쇼니 부족 여인의 도움을 받은 안나 피어스 홉스 박사가 1830년대에 들어서야 파악했고, 정확한 독성 성분을 분리한 건 1928년이다. 당시는 소가 먹은 것이 대부분 그 소젖에도 반영된다는 것이 아직 밝혀지기 전이었다.] 그 후 아버지는 [[재혼]]했는데, 새어머니 사라 부시 링컨(1788 ~ 1869)은 책을 좋아하는 링컨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지원했다. 그녀도 재혼 당시 2남 1녀를 둔 미망인이었는데, 이들도 링컨과 친형제처럼 잘 지냈다.[* 이후 비슷한 사례를 가진 미국 대통령은 [[제럴드 포드]](본명은 레슬리 린치 킹 Jr.). 차이점은 새어머니가 아닌 새아버지가 대상.] 토머스 링컨이 아들에게 노동의 길을 강요할 때도 링컨을 지지하고 도와주며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링컨은 정규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지만, 그 대신 풍부한 [[독서]]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 독서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평소 독서를 좋아하는 링컨이 어느 일하던 집(판본에 따라 학교 담임선생님의 집)에서 [[조지 워싱턴]]의 [[위인전]]을 빌려온 후 밤늦도록 읽다가 너무 졸려서 뒷부분은 다음날 마저 다 읽기로 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만 비가 와서 머리맡에 둔 책이 다 젖어버린 것이었다. 링컨은 용서를 빌려고 그 집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용서를 받는 대신 며칠 간 그 집에서 일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집주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링컨은 그 집에서 며칠간 일을 하였고, 집주인은 링컨이 [[책벌레]]라는 것을 알고 보답으로 그 워싱턴 위인전은 물론 다른 책들도 몇권 더 줬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시골]]에서 [[책]]은 귀한 사치품으로, 150년 뒤인 [[뉴딜 정책]] 시기에 켄터키 주의 문해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짐말에 책을 싣고 켄터키의 농장을 돌아다니며 책을 빌려주는 짐말 도서관 프로젝트([[https://en.wikipedia.org/wiki/Pack_Horse_Library_Project|Pack Horse Library Project]])가 처음으로 시행될 정도였다.]. 또한 사라는 유머 감각이 풍부하여 링컨과 곧잘 농담과 장난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아래 더글러스와의 토론에서처럼 링컨이 정계에서 보인 유머 감각은 대부분 사라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주류 의견이다. 이 때문에 에이브러햄 링컨의 가족사는 '''[[계모]]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 사례'''로 흔히 인용된다.[* 계모의 이미지가 부정적인 옛날 이야기들을 보면 대체로 주인공 집안이 부자이거나([[신데렐라]], [[장화홍련전]]) 뭔가 이득을 노린 경우([[콩쥐팥쥐]])가 대부분. 집안의 재산과 권력이 크면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남매&자매끼리도 개싸움을 벌이는 건 역사에서 흔히 일어났고, 지금도 재벌가들에서 흔히 벌어지는 [[왕자의 난#s-3|왕자의 난]] 같은 것들만 봐도 잘 알 수가 있고, 비단 재벌가 뿐만 아니라 부잣집들은 이러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꼭 가난해도 사이가 나쁠 때는 나쁘고 부유해도 좋을 때는 좋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위의 경우를 봐도 계모 입장에서는 링컨이 노동으로 돈을 벌어오는 쪽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또 생몰년도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라 링컨은 의붓아들의 대통령 당선과 [[참척#s-2|암살]]까지 보고도 4년을 더 살았을 정도로 장수했다.][* 의붓아들보다 오래 살아서, 비공식적인 호칭이지만 링컨 재임 내내 Mother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현직 미 대통령의 어머니)로 불렸다. 이 호칭은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아버지 부시]]의 영부인이자 아들 부시의 어머니 [[바버라 부시]]도 받은 적이 있다. 미국 대통령의 생존한 모친을 언급할 때 쓰는 표현이다.] 1829년 멕시코와 국경분쟁이 벌어질때 참전하기도 하고 군인으로 복무하기도 한 그는 성인이 된 이후 돈도 직접 벌 겸 독립하려는 생각으로 집을 나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루이지애나로 간 뒤 그 후 우체국장[* 말이 좋아 우체국장이지, 사실상 집배원 일도 다하고 작은 우체국 관리도 하던 일이었다. 링컨 본인은 일은 마음에 들었으나 돈은 박봉이라 측량 기사랑 투잡으로 일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뱃사공, 측량기사, '''[[프로레슬러]]'''[* 193cm의 거구였으며, 마른 체구로 보이나 힘은 장사여서 일리노이 주 챔피언을 지내기도 했다. 인생이 험난했던 것과는 달리 프로레슬러로써의 경력은 매우 성공적이라서 12년간 단 한 번만 패배했다. 당시의 프로레슬링은 현재와는 달리 체육관의 링이 아닌 공터나 술집 앞 등의 맨바닥에서 구경꾼들이 선수들을 둥글게 둘러싼 상황에서 벌어졌다. 이때의 프로레슬링 활동으로 1992년 미국 레슬링 협회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다. [[https://nwhof.org/stillwater/hall-of-fame/4/#type=hof&honoree=129|관련 내용]].], 가게 점원 등 여러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사업을 실패하고''' 다음 해 치른 1832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서도 '''13명 중 8위로 [[낙선]]'''했다. 이듬해 그는 또 사업에 실패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두 번의 사업 실패의 빚을 갚는 데만도 17년이 걸렸다고 한다. || [[파일:external/edu.glogster.com/34818991.jpg|width=300]] || [[파일:external/totallyhistory.com/Abraham_Lincoln_by_Alexander_Helser_1860.jpg|width=300]] || || 1846년. 첫 하원 당선 당시. [* 현재까지 확인 된 링컨의 사진 중 가장 최초로 찍힌 사진이다. ] || 1860년. 특유의 수염으로 잘 알려진 그의 면도한 모습이 어색하다.[* 참고로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턱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공화당 대선 후보 시절 [[https://en.wikipedia.org/wiki/Grace_Bedell|그레이스 베델(Grace Greenwood Bedell Billings)]]이란 한 소녀가 [[수염]]을 기르면 보기 좋아 보일 거라고 했기 때문이라는데, 훗날 수염을 기른 후 그 소녀를 찾아가 좀 나아졌냐고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 간신히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834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 재출마해 당선되면서 비로소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일리노이 주 의원 의장에는 낙선'''. 1840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도 '''낙선''', 1844년에는 연방하원 의원 '''공천 탈락''', 1846년에야 간신히 하원 의원에 당선되니 그의 나이 37세. 20대 초반부터 정계에 투신한 것 치고는 상당히 늦은 것이었다. 게다가 고작 2년만 재임하였다. 다시 1855년 연방상원의원 '''낙선''', 1856년 [[미국 부통령|부통령]] 후보 경선에서도 1/3 정도의 지지(110/350)만 받으며 월리엄 데이튼에게 '''낙선'''. 어느덧 그의 나이는 40대를 넘어 50대로 향하고 있었다. 1858년엔 상원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시 유명 정치인이던 [[스티븐 A. 더글러스]]와 경쟁을 벌인다. '''이 선거에서도 링컨은 낙선했지만''', [[노예]] 문제에 대해 단호히 반대입장을 밝혀 노예제 반대 입장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우뚝서게 된다. 이때 링컨과 더글러스가 벌인 세차례의 토론은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에 남은 명토론으로 평가된다. 당시 이슈는 새로 미연방에 편입되는 주들에게 노예제를 금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였다. 더글러스는 해당 주의 거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주장이었고, 링컨은 투표를 통하더라도 노예제를 허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후에도 벌어지는 링컨과의 라이벌 관계 때문에 더글러스가 매우 적극적인 노예제 찬성론자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고, 앞서 언급했듯이 주의 자율에 맡기자는 온건파에 가까워 도리어 남부 민주당 강경파들에겐 까이던 인사였다. 이 당시 링컨은 노예제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주들에서도 노예제를 바로 폐지해야 한다는 급진적 공화당 분파와 노예제에 찬성하지 않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했던 민주당 온건파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당시에는 미 연방 상원의원을 주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했기 때문에, 링컨에 대한 지지 자체는 더 높았으나 선출되진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개표결과도 그렇게 큰 격차가 아니었다. 이 당시 토론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찬성측 입론(더글러스)''' > 링컨은 상원의원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인 '분열의 집(House Divided)'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그 연설문 중 일부를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분열되어 자기 자신을 향해 적대하는 집은 바로 설 수 없으리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은 노예제를 찬성하고 절반은 반대를 하는 상태로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집이 무너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집의 분열이 그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간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 하지만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노예제도가 추가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고 노예제도가 궁극적으로는 폐지되는 과정 속에 놓여있다는 신념이 대중 속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반면에 노예제도 옹호론자들은 기존의 주에서부터 신생 주에 이르기까지, 남쪽에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합법화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밀어붙이려 할 것입니다." > 노예제도를 반대한다는 그의 얘기를 듣고 흑인 공화당원들은 아주 좋아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링컨은 멕시코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또한 노예도주법을 반대하고 워싱턴에서 노예 해방을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링컨은 백인과 흑인에 대한 모든 사회제도 상의 평등을 주장하며 심지어는 흑인과 백인이 결혼할 수도 있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링컨의 주장은 사회적인 불안과 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 여기서 제가 밝혀둘 것은 제가 통과시킨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의 원래 취지는 무엇보다도 미합중국이 자치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문제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 스스로가 결정하게 하자는 주권재민(Popular sovereignty)의 원칙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새로 편입되는 주의 지역주민들이 노예제도에 관해 허용할 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주권재민의 올바른 적용이야말로 노예제도로 인한 갈등을 끝내고 북부와 남부의 주들이 평화로운 공존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 > '''반대측 질문(링컨)''' > 더글러스 후보는 저를 모함하는 많은 의문과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모함하는 자신의 주장들에 대해 아무런 근거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의 질문에 대해 분명히 대답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그동안 취해왔던 정치적 입장들 중 일부는 제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제가 속해 있는 공화당의 입장도 섞여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 먼저 저는 도주 노예법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고 수정을 요구했음을 밝혀 둡니다. 더글러스의 주장은 이렇듯 사실 부분에서 여러가지로 잘못된 점이 많습니다. 저는 '흑인은 헌법상 연방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재판을 청구할 자격이 없고 노예의 소유는 헌법에 보장된 재산권의 일부로써 보호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드레드 스콧 판결문을 지지했던 더글러스에게 묻습니다. 이 판결문의 법리대로라면 지역 주민 대다수가 노예제도의 폐지를 원한다고 해도 과연 가능키나 한 것일까요? > 더글러스가 통과시킨 캔사스-네브래스카 법은 그동안 미합중국에서 노예제도가 인정될 수 없는 지역이라고 국가적 합의가 이루어졌던 지역에 다시 노예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길을 여는 행위 아닙니까? 더글러스야말로 노예제도를 미국 전역으로 확산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그리고 노예제도가 과연 주정부 자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보십니까? 과연 주류법 같은 자치 영역의 문제들과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일까요? > > '''반대측 입론(링컨)'''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 본론에 앞서 먼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저와 더글러스가 결코 다투지 않고 기꺼이 합의하는 원칙들이 다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모든 주가 노예제도를 포함하여 자치 문제에 관해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그의 주장인데, 저 역시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는 제가 이 문제에 관해 그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거듭 주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제 견해를 계속 왜곡하고 있지만 이에 관한 제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힙니다. > 그는 '왜 우리 정부가 절반은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절반은 반대를 하는 상태로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서 저의 그와 같은 의견에 대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그의 또다른 질문 한 가지는 '왜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토대를 그대로 놔두지 않는가?'였는데 바로 이 점이 그와 제가 정확히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 저는 더글러스와 그의 동료들이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다져 놓은 원래의 건국이념을 훼손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더글러스가 우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노예 매매를 근절시켜서 노예제도의 근원을 차단했으며, 기존의 주 이외에 새로 생기는 주에서만큼은 노예제도를 제한시키는 제도를 채택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는 너무나 명백해서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든 그것이 노예제도의 근절을 염두에 둔 포석임을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더글러스는 저더러 왜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든 그대로 놔둘 수 없느냐고 물었는데 오히려 제가 그에게 왜 그분들이 만든 대로 놔두지 않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 하지만 더글러스와 그의 동료들은 이 건국 당시의 정책을 파기시켜버린 후에 미국 전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구적인 제도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 어디서건 제가 요구하거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건 오직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원래 닦아놓은 법률적 토대로 이를 다시 되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노예제도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지역들에서만 합법화하고 새로운 주들에게로 확산시키지 않도록 제한함으로써 건국의 아버지들이 추구했던 정책으로 다시 되돌리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노예제도가 완전히 사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저는 이 자리에서 캔자스-네브래스카 주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것이 주권재민에 관한 문제인 양 본질을 호도하는 것은 자유인과 노예가 공존할 수 없다는 미국 건국이념에 위배된다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 > '''찬성측 질문(더글러스)''' > 링컨은 국부들이 노예제도 폐지를 원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맞는 말입니까? 과연 그럴까요? 우리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은 이에 관해 뭐라고 말했을까요? 과연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링컨의 주장대로 생각했을까요? 미국 건국의 주역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 백인 남성들이었습니까? 아니면 흑인들이었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가 흑인들과 동등히 대우받아야 한다는 링컨의 주장에 찬성하십니까? > > '''찬성측 반론(더글러스)''' >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정부는 백인이 주축이 된 건국의 아버지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즉 백인에 의해, 백인의 이익을 보호하고, 백인의 무궁한 번영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다가올 모든 시대에도 백인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세워졌습니다. 링컨의 연설은 일리는 있지만 내전을 부추기는 연설입니다. 링컨이 드레드 스콧 판결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백인과 흑인 간의 인종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주장하는 주권재민이야말로 우리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이 꿈꾸었던 지역분권형 정부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 독립선언서들의 참여자들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선언했을 때, 흑인이나 인디언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 흑인이 백인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사회적, 정치적, 법적인 평등까지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동의하신다면 링컨에게 표를 던지십시오. 저는 노예해방뿐만 아니라 백인과 흑인의 사회적 통합까지 지지하는 링컨 같은 급진적인 공화당원이 결코 아닙니다. >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링컨은 북쪽으로만 가면 극단적인 노예해방론자처럼 굴면서도, 남쪽으로 가면 또 자신이 충실한 휘그당원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렇게 링컨은 지역에 따라서 자신의 주장을 이리저리 바꾸는 사람입니다. 링컨처럼 가는 곳마다 주장이 달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입니다. 또한 그는 예전에 자신이 경영하던 상점에서 법을 어기고 술을 판 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불법행위이고, 이렇게 법을 어긴 사람이 상원의원에 당선된다면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링컨은 절대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 마지막으로 밝혀두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가 만든 법안이 반드시 노예 해방 반대 입장 쪽으로만 이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노예 해방을 원하는 주의 주민들은 지역 경찰법에 노예소유주가 도망간 노예를 경찰권으로 되찾아올 수 있는 조항을 제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예제도를 선택하지 않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 '''반대측 반론(링컨)''' > 더글러스는 저더러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제가 얼굴이 하나 더 있었더라면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하필 잘생긴 얼굴을 놔두고 이렇게 못생긴 얼굴로 여기까지 나왔겠습니까? > 그리고 더글러스가 제가 술을 팔았다는 얘길 한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가게를 운영하던 때에 제 가게에서 가장 술을 많이 사 먹던 고객이 바로 더글러스였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저는 이미 술을 파는 계산대를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더글러스는 아직까지도 그 술 파는 가게의 충실한 고객으로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이 과거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건 사실인데, 사실 링컨은 "베리&링컨"의 지분만 있을 뿐 실제 운영자는 아니었다. 당시 주세법은 술집으로 운영되지 않은 가게가 파는 건 되지만 가게에서 마시는 걸 금지 했는데, 이 가게는 술이 잘 팔려서 나중에 술집으로 등록한 케이스로, 링컨은 후일 지분을 정리했고 동업자 베리는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기록이 없어 더글러스가 실제 링컨의 충실한 고객(?)이었는 지 검증하긴 불가능에 가깝지만, 링컨은 술을 판 사람보다 마신 사람이 문제라는 논지에 더해 더글러스는 여전히 자신의 옛 주장(모호한 태도)에 메달리고 있다는 걸 은유한 역공을 펼친 것이다. 이 토론 자체가 후대로 갈 수록 윤문 된 것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언제 백인과 흑인 간의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주장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흑인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다거나, 배심원이 된다거나 혹은 공직에 오르고 또 백인과 결혼하는 것까지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진 이후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어디서도 흑인이 독립선언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독립선언서에 흑인이 포함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3년 전 어느 무렵부터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이란 말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물론 저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3년 전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노예제도의 우위와 영속성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 그러나 독립선언서에 대한 이러한 공격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제가 단언컨대, 적어도 3년 전까지는 아무도 감히 그것을 대놓고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라도 믿는 척 가장하는 은밀한 방식이었던 것이 이 무렵부터 독립선언서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낸 사람은 드레드 스콧 사건의 수석필사인 테이니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여러분이 아시는 더글러스이며, 아시다시피 그것은 지금 더글러스가 속해 있는 당 전체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었습니다. > 또한 더글러스는 제 주장이 가는 곳마다 달라진다고 하는데 제 연설문은 아시다시피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직접 비교를 해 보시면 과연 제 말이 달라졌는지를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제가 인종평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노예해방론자들 못지않게 노예제도를 혐오해 왔습니다. 저는 노예제도 자체가 적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싫습니다. 저는 이 제도가 미국이 민주국가로서의 모범을 전 세계에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 노예제도는 자유에 기반을 두는 민주주의 제도의 적이 될 수 있고, 우리를 위선자로 조롱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 참된 동반자들이 우리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독립선언문을 조롱하고 이기심 이외에는 인간에게 적절한 행동원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나 전제들과 대립하도록 우리의 많은 선한 이웃들을 몰아가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는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지향과 반대되는 이기심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미주리 타협안을 배척하고 독립선언문을 무시하고 우리의 지난 모든 역사를 되돌린다 해도 고귀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을 모두 떨쳐버릴 수는 없습니다. 노예제도의 확산이 나쁘다는 도덕적 판단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 심성 깊숙히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생명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 자치의 원칙은 옳습니다. 절대적으로 영원히 옳습니다. 그러나 주권재민의 원칙은 이 문제에 관해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노예제도에 자치의 원칙이 적용되는 문제는 흑인이 인간인지 아닌지 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흑인이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제를 자치에 내맡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흑인이 인간이라면 그들 스스로를 규율할 수 있는 권리를 막는 것 그 자체가 자치의 원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흑인 노예제 문제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던 1860년 말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치러진 대선]]에서, 링컨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북부 민주당(스티븐 더글러스)과 남부 민주당([[존 C. 브레킨리지]])으로 쪼개지면서 링컨으로선 [[어부지리]]적인 효과도 얻었다. 당시 스티븐 더글러스가 노예제를 '''각 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민주당 출신 치고 나름대로는 중립적인 발언을 해서 브레킨리지를 대표로 한 남부 출신 인사들의 미움을 산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링컨과 대립을 한 최대의 거물 정치인이었지만, 막상 훗날 남북전쟁이 터지자 연방주의자였던 더글러스는 링컨에게 협력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무려 2~30만의 의용군을 모으기도 했다. 이 사람도 뻘소리는 제법 했지만 보통은 아닌 셈.] 더글러스는 유권자 선거에서는 100만 표 넘게 받으며 2위를 차지하지만, [[텃밭(정치)|텃밭]]이던 남부를 존 C. 브레킨리지가 가져가면서 선거인단은 '''12명'''밖에 못 얻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한다. > '''"악어와 흑인이 함께 있다면 나는 흑인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백인과 흑인이 함께 있다면 백인을 돕겠다."''' > - 대선 연설전에서 스티븐 더글러스가 한 말. 또한 이 선거는 당선자의 득표율이 40%를 넘지 않은(39%) 유일한 선거다. 공화당의 분열 덕에 당선된 것으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도 41%는 됐다. 여하간 정리하면 그는 인생에서 '''두 번의 사업 실패와 10번의 선거 중에 7번의 낙선을 밟았다'''. 거기에 9살 때 어머니를 잃고, 19살 때 누이를 잃고, 26살 때 약혼녀를 잃고, 41살 때 차남 에드워드, 53살 때 삼남 윌리엄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그리고 자신도 제 명을 다하지 못했고, 아내도 출신 성분 때문에[* 아내 메리 토드는 은행가 출신의 부잣집 딸이었고, 또한 사실상 [[무학#s-2.2|무학]]인 남편과 달리 고등교육을 받았다. 때문에 가족들이 링컨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지만, '''링컨이 아니라 토드 본인이''' 가족을 필사적으로 설득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토드 본인이 '대통령이 될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 더글러스와 결혼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링컨과 결혼하자 충격을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사치와 성질이 조금 심한데다 인격도 좀 [[개차반#s-1|개차반]]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스티븐 A. 더글러스|평생의 정적]]이 따라붙어 곤욕을 치르기까지 했다. 다만 링컨의 저학력에 대해선 이 당시 미국은 의무교육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된다. 미국에서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852년 매사추세츠부터이고, 전국적인 의무교육 보급은 19세기 후반이 되어서부터이니 링컨처럼 그 이전에 유소년기를 보낸 세대들은 당연히 무학의 비율이 높았다.[* 원래부터 청교도적 평등주의와 지성주의가 강해 교육 투자가 활발했던 [[뉴잉글랜드]] 등 북동부 지역은 의무 교육 이전부터 교육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었으나 링컨이 일생 대부분을 보낸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 등의 내륙 지방 농촌은 당시로서는 신규 개척지에 가까워 교육 여건은 커녕 교육 받은 이의 수도 태부족이었다.] 거기에다가 좀 배웠다거나 부유했다거나 하는 사람들도 집에서 [[가정교사#s-1|가정교사]]를 따로 두며 공부를 하거나 [[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링컨 이전까지 15명의 대통령이 있었는데, 이 중에 독학 대통령은 무려 6명이었고, 심지어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학력도 지금의 [[초졸]] 정도의 수준이었다. 즉, 링컨의 전임 대통령들 중 절반 가까이가 독학한 대통령이었던 셈.] 당시 [[대학]]은 부유한 집에서 교양 및 과시용으로 다니는 게 아니라면 순수하게 학문 자체를 하려는 사람들만 진학했으며, [[변호사]]도 변호사 사무소에서 일 좀 배운 뒤에 개업하는 경우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 [[존 애덤스]]처럼 20대에 변호사가 되는 케이스도 흔했다.] 이처럼 정규교육을 안 받고도 본인 분야에 필요한 실력을 갖추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애시당초 미국 건국 초기에는 독학 대통령이 많았는데, 이런 독학 대통령의 필수 코스(?)가 독학 - 변호사 - 대통령으로 어느 직업을 가지든 일단 독학한 이후 변호사가 되면 대통령 테크를 탔다는 거다. 참고로 현재까진 최후의 독학 대통령은 19세기 말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다.][* 물론 대부분의 독학 대통령들이 변호사 자격을 거친 것 역시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닌 것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법조인 출신 정치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법치국가]]에서 법조인(변호사)은 정치계에 진출하기 상당히 유리한 직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대 미국 사회의 경우 (건국의 아버지들 가문을 비롯한 여러 명망있는 가문들이 정치를 해먹었던 건국 초기를 제외하면) 근세 ~ 근대 유럽 사회에 비해 귀족이나 명문가 등이 차지하는 사회적 입지가 비교적 작았고 현대국가에 비교하면 전문적인 [[기술관료]] 집단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이었으니 자연히 공직자 중에서 법 전문자들이 차지하는 지분이 컸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정규교육을 안 받고도 지역의 유력자로 명망을 쌓아 정치적 경력을 시작하기에 변호사만큼 유리하고 좋은 직업이 별로 없었다는 것.] 즉, [[의무교육]]이 당연해진 21세기의 사정과 비교하기는 힘들다는 얘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